체크박스 하나를 생각해보자. 사각형 안에 체크 표시. 이걸 처음 본 사람도 클릭하면 뭔가 선택된다는 걸 안다.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튜토리얼이 없어도. 이게 바로 디자인 관용구(idiom)의 힘이다. 사용자가 이미 알고 있는 패턴을 그대로 쓰는 것, 즉 학습 비용 제로의 인터페이스다.
그런데 지금 웹 환경은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essays.johnloeber.com의 '관용적 디자인을 되살리자'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짚는다. 날짜 선택기는 사이트마다 다르고, Enter 키는 어떤 앱에서는 전송이고 어떤 앱에서는 줄바꿈이다. <a> 태그 대신 onclick을 달아놓은 <span>이 넘쳐나고, 스크린리더는 침묵한다. Windows 95 시절 'File, Edit, View'라는 공통 메뉴 구조가 모든 프로그램에 동일하게 존재하던 시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인터페이스의 바벨탑이다.
이 균열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모바일 전환이 마우스·키보드 중심의 패턴을 흔들었고, React·TypeScript 기반의 커스텀 빌드 문화가 표준 HTML 요소를 밀어냈다. 컴포넌트 재사용 문화는 잘못된 패턴까지 함께 복제했다. 10년 이상 누적된 결과가 지금의 UX 품질 침식이다. 프레임워크는 빠르게 진화했지만, 공통의 인터랙션 언어는 오히려 파편화됐다.
여기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AI 코딩 도구, 흔히 '바이브 코딩'이라 불리는 자연어 기반 UI 생성이다. 요즘IT의 '비개발자가 겪은 바이브 코딩의 현실'은 이 경험을 솔직하게 해부한다. 누워서 말로 던지면 화면이 나온다. 로그인 기능도, 어드민 대시보드도 금방 나온다. 처음엔 마법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마법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보인다. AI는 맥락 없이 "로그인 만들어줘"를 받으면 로그인처럼 보이는 것을 만든다. 버튼은 눌리고, 화면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보안 설계, 개인정보 처리 방식, 권한 구조는 빠져 있다. 겉모양은 관용적으로 보이지만, 속은 비어 있는 인터페이스다. 그리고 이 빈 속을 채우려다 보면, 고치다가 더 큰 오류를 만들고, 구멍 난 양말을 기우듯 땜질을 반복하게 된다.
두 글이 동시에 가리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AI가 UI를 빠르게 생성할수록, 관용적 디자인 원칙은 더 중요해진다. AI는 프롬프트에 담긴 의도만큼만 결과를 만든다. "토스처럼 만들어줘"라고 했을 때 AI가 참조하는 건 결국 기존에 학습한 인터페이스 패턴, 즉 관용구의 축적이다. 관용적 설계 원칙이 무너진 웹 환경에서 AI가 학습한 패턴은 그 파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AI는 나쁜 관행도 충실하게 재현한다.
반대로 말하면, 관용구가 잘 정착된 영역에서는 AI 생성 결과물의 품질도 따라 올라간다. Apple이 iOS 전반에 일관된 디자인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 Substack이 제한된 커스터마이징으로 안정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는 것은 단순한 브랜드 전략이 아니다. 이런 시스템이 쌓인 관용구는 AI 학습 데이터의 품질 기준점이 된다. "it just works"라는 신뢰는 AI가 생성하는 UI에도 전이된다.
바이브 코딩의 현실이 알려주는 또 다른 교훈은 기획의 복권이다. 맥락 없는 프롬프트는 맥락 없는 결과를 낳는다. "피그마 코멘트 백업해줘"와 "백업되는 요소는 작성자·시간·내용이고, 원본 위치에 매칭해서 파일로 저장하고 복원까지 되어야 해"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이건 AI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두루뭉술하게 말해온 대가다. AI는 우리의 언어 습관을 거울처럼 돌려준다.
그리고 이 기획의 핵심에는 관용구가 있다. "버튼은 버튼처럼 보여야 하고", "링크는 밑줄과 색으로 구분되어야 하고", "ESC는 닫기여야 한다"는 원칙들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다. 이건 수십 년간 수억 명의 사용자가 학습해온 인터랙션 언어다. 이 언어를 프롬프트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AI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다. 관용적 설계를 아는 사람이 더 나은 바이브 코더가 된다.
실무적으로 지금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은 간단하다. <button> 대신 onClick 달린 <div>를 만들지 말 것. 브라우저의 뒤로가기가 작동하도록 URL 구조를 설계할 것. 아이콘만 쓰지 말고 텍스트 레이블을 붙일 것. AI에게 UI를 시킬 때 "접근성 기준을 지켜줘"를 명시적으로 요청할 것. 이 원칙들은 AI 시대 이전부터 있었지만, AI 시대에 더 명시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들이다. AI는 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전망은 양면적이다. 낙관적 시나리오는 이렇다. AI가 UI를 대량 생성하면서 오히려 디자인 시스템과 관용구의 중요성이 재조명되고, shadcn/ui 같은 표준화된 컴포넌트 라이브러리가 새로운 공통 언어로 자리잡는다. 비관적 시나리오는 반대다. AI가 파편화된 패턴을 더 빠르게 복제하면서, 접근성과 일관성은 더 빠른 속도로 무너진다.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는 결국 Human in the loop, 즉 설계하는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다. AI가 속도를 주는 대신, 방향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관용적 디자인을 아는 사람이 그 방향을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