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는 지난 한 해 동안 AI 에이전트 96개를 만들었다. 지금 살아 있는 건 46개다. 생존율 48%. zdnet 보도에 따르면 이경화 LG전자 AX플랫폼팀장은 AX 페어 2026에서 이 수치를 직접 공개하며 실패 원인을 명확히 짚었다. "AI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고민하는 기술 중심 접근 때문"이었다고.
이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LG전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수많은 팀이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걸 목격하고 있다. GPT API 붙이고, 에이전트 프레임워크 세팅하고, 그럴싸한 데모 만들고—그러고 나서 3개월 뒤에 아무도 안 쓰는 슬랙 채널처럼 방치된다. 기술 스택이 문제가 아니다. 시작점이 잘못된 것이다.
살아남은 에이전트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업무 병목에서 출발했다. 대표 사례가 '광고 문구 검토 에이전트'다. LG전자는 영업이익의 6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는 구조라 글로벌 광고 규제 검토가 필수다. 사내 변호사들이 수작업으로 처리하던 이 반복 업무를 AI가 선처리하면서 생산성 효과 2위를 기록했다.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변호사가 매일 하기 싫은 일'을 정확히 겨냥한 결과다.
다국어 번역 에이전트 사례는 한 층 더 깊은 교훈을 준다. 각 부서에 번역 AI 툴을 개별 도입하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부서마다 번역 결과가 달라지는 메시지 충돌이 진짜 병목이었고, 해결책은 기술이 아니라 조직 간 데이터와 프로세스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경화 팀장이 "임원들이 직접 발로 뛰었다"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다. AI가 번역을 아무리 잘해도 부서 간 사일로를 허무는 건 사람의 몫이다.
dev.to에서 다룬 'AI 챗봇과 AI 에이전트의 차이' 분석이 이 맥락을 기술적으로 보완해준다. 챗봇의 최소 단위는 질문-답변이지만, 에이전트의 최소 단위는 프로세스다. 목표 이해 → 재료 점검 → 단계 분해 → 실행 → 결과 검증. 이 루프가 설계되지 않은 에이전트는 결국 비싼 챗봇에 불과하다. 에이전트를 챗봇처럼 다루는 습관이 신뢰성 저하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LG전자의 50% 폐기율은 이 설계 공백의 현장 증거다.
시사점은 분명하다. AI 에이전트 도입의 성패를 가르는 건 세 가지 설계 단계다.
첫째, 문제 정의 우선. 기술 역량에서 출발하면 실패한다. '우리 팀에서 매주 반복되는 가장 지루한 작업이 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에이전트는 탐색 도구가 아니라 검증된 병목을 자동화하는 도구다.
둘째, 운영 체계 선설계. 에이전트를 배포하기 전에 실행 규칙, 인간 체크포인트, 결과 검증 기준을 먼저 정의해야 한다. LG CNS가 AX 페어에서 공개한 에이전트웍스 플랫폼이 '거버넌스·비용 관리·모델 라우팅'을 핵심 모듈로 구성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축보다 운영이 더 어렵다는 현실을 아키텍처로 대응한 것이다.
셋째, 성과 측정 루프. LG전자는 각 에이전트별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 효과를 대시보드로 관리하며 운영 여부를 판단한다. 에이전트를 많이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성과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선언은, 측정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없다는 기본 원칙의 재확인이다.
전망은 냉정하게 봐야 한다. 에이전트 플랫폼은 빠르게 성숙해지고 있고, LG CNS의 에이전트웍스처럼 기업용 통합 솔루션도 시장에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플랫폼이 좋아진다고 해서 '문제 정의를 건너뛰는 습관'이 자동으로 고쳐지지는 않는다. 에이전트 생존율이 50%에 머무는 한, 기업들은 개발 비용의 절반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테크 리드 입장에서 이 숫자를 보는 방식은 하나다. 에이전트를 몇 개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몇 개가 6개월 후에도 살아서 돌아가고 있느냐로 AI-First 전환의 성숙도를 판단해야 한다. '배포된 에이전트 수'는 허영 지표다. '월간 활성 에이전트 수'와 '폐기율 추이'가 진짜 지표다. LG전자의 솔직한 공개가 가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기준을 팀 내에서 먼저 세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