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L 하나를 입력하면 색상 팔레트, 타입 스케일, 스페이싱 리듬, 보더 래디어스까지 추출해 디자인 토큰 세트를 자동으로 뽑아내는 시대가 됐다. dev.to에 공개된 Hugo Naili의 실험은 이 과정이 단순한 CSS 스크래핑이 아님을 보여준다. DOM 요소의 시각적 현저성(prominence)을 면적·뷰포트 거리·시맨틱 역할로 가중치를 매기고, OKLCH 색공간에서 클러스터링하며, 모듈러 스케일로 타입 비율을 피팅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기술적으로 놀라운 완성도다.
그런데 이 자동화 파이프라인이 정교해질수록, 나는 오히려 반대편 질문에 더 눈길이 간다. 추출된 토큰을 실제 제품에 '출시'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자동화가 해결하는 것과 해결하지 못하는 것
색상 역할 할당을 예로 들어보자. 알고리즘은 가장 넓은 면적의 클러스터를 background로, 채도가 가장 높은 인터랙티브 요소의 색을 primary로 추정한다. Hugo의 코드는 '잘못된 역할 할당이 빠진 토큰보다 나쁘다'고 명시한다. 틀린 레이블이 붙으면 다운스트림 컴포넌트가 '자신 있게 잘못된 결과물'을 렌더링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불확실한 경우 강제 할당 대신 unassigned pool로 보내는 선택 역시 엔지니어의 판단이 개입한 결과다.
브랜드가 리브랜딩 중일 때, 메인 페이지와 내부 페이지가 서로 다른 토큰을 쓸 때, 또는 Dark mode가 기본값으로 설정된 사이트일 때—알고리즘은 이 모든 경우를 '인간이 처리해야 할 플래그'로 분류한다. 자동화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고리즘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스크린샷을 '추출 소스'가 아닌 '검증 도구'로만 사용하는 아키텍처 결정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도구로 쓰고 무엇을 진실의 원천으로 삼을지는 알고리즘 바깥의 판단이다.
안목은 필터고, 판단은 서명이다
GeekNews에서 공유된 '안목, 판단 그리고 AI' 글은 이 지점을 다른 언어로 정확히 짚는다. 안목(taste)은 충분한 증거가 없어도 무엇이 뛰어난지 알아보는 능력이다. 수백 개의 색상 클러스터 중 어떤 조합이 그 브랜드답게 느껴지는지, 추출된 타입 스케일이 실제 서체와 어울리는지—이건 OKLCH 거리값이 알려주지 않는다. 반복적인 제작 경험과 좋은 결과물에 대한 폭넓은 노출이 쌓여야 형성되는 감각이다.
판단(judgment)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그 선택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결과에 책임지는 행위다. 2012년 Apple Maps 출시 당시, 시각적 렌더링 품질은 훌륭했다. 벡터 기반의 선명한 지도, 세련된 타이포그래피—안목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다리가 강으로 녹아들고, Berlin 검색이 Antarctica로 연결되는 데이터 품질 문제는 제품 판단의 실패였다. Tim Cook이 팀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공개 사과문을 쓴 것은 안목이 아닌 판단의 영역이다.
AI가 선택지를 늘릴수록 필터의 가치가 올라간다
디자인 토큰 자동 추출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AI가 선택지의 수를 급격히 늘린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비용 때문에 하나의 버전만 만들 수 있었다. 이제는 URL을 바꿔가며 10개 브랜드의 토큰을 동시에 추출하고, 각각 다른 레이아웃으로 재스킨해 비교하는 게 가능하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구별하는 능력—즉 안목—의 값어치가 올라간다. AI가 생성한 비슷한 결과물만 반복해서 보는 좁은 소비 루프는 오히려 이 안목을 무디게 한다.
실무 프로세스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자동 추출된 토큰 세트는 primary, background, text, surface까지 그럴듯하게 레이블이 붙어 있다. 이걸 그대로 디자인 시스템에 올리고 컴포넌트를 빌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토큰이 실제 사용자 경험에서 그 브랜드처럼 느껴지는가'를 판단하고 출시를 승인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알고리즘이 roundness 스칼라를 추출해 패딩 계산에 반영한다 해도, 그 결과물이 브랜드의 개성을 살리는지 아니면 색깔만 바꾼 남의 레이아웃처럼 보이는지는 눈과 경험이 판단한다.
워크플로우 설계에 남는 진짜 질문
AI 에이전트가 안목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는 더 이상 핵심 질문이 아니다. 에이전트가 선택지를 만들고 순위를 매기는 역할을 맡는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결과에 이름을 거는 행위다. 디자인 토큰 자동화 파이프라인을 팀에 도입할 때 실제로 설계해야 하는 것도 그 지점이다. 추출 정확도나 클러스터링 알고리즘보다, '어떤 기준으로 검증하고 누가 최종 승인하는가'를 먼저 정해야 한다.
판단은 도메인마다 다르게 쌓인다. 디자인 토큰의 품질을 판단하는 능력은 수백 개의 컴포넌트를 직접 빌드하고, 브랜드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반복해서 경험하며 누적된다. AI가 그 경험을 단축할 수 있지만, 결과에 가까이 머물며 예상과 실제를 비교하는 과정은 대체되지 않는다. 자동화가 정교해질수록, 그 자동화를 언제 믿고 언제 의심할지 아는 사람의 역할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